이원찬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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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찬(1893년 ~ ?)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1893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재학당과 보광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한성은행, 조선총독부, 강화군수, 김포군수, 가평군수를 역임했으며, 대동상업학교 교장과 전의면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제주해사국 부국장, 여수항만청장, 인천해사국장, 부산해사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부산 제5편리호 침몰 사고와 관련되어 직무 유기 혐의로 파면되었고, 민주당에 참여하여 서울시의원을 지냈다. 그는 친일 행적과 독재 정권 협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역 사회에 기여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원찬은 1893년(고종 29년) 5월 14일 (5월 10일이라고도 한다.)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하타니 쇼호비루(羽溪松豊)이다. 1905년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고, 1907년 사립 보광일어학교(普光日語學校)에 입학하여 1911년 3월 졸업했다. 1912년 8월 동양생명보험주식회사(東洋生命保險會社) 경성지점에 입사했다가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4월 주오 대학(中央大学)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17년 신익희, 안재홍 등이 주도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했다.[6] 1918년 8월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2. 생애
1918년 8월 1일 한성은행(漢城銀行)에 입사, 남대문로 한성은행 본점 서기가 되었고, 1920년 5월 한성은행 동경(東京)지점 서기로 근무하다가 1922년 5월 사직하고 귀국하였다. 1922년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보안계 속(屬)으로 근무하였다. 1926년 4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속(屬)으로 발령받아 검열 업무를 담당했다. 1930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 속에서 군수 8등으로 임용되었다.[14] 3월 1일 강화군수로 발령받았다.[15]
1931년 5월 31일 강화양조(江華釀造) 주식회사의 대주주이자 회사 전무이사가 되었으며,[21] 1932년 6월 경기도 강화인삼조합 고문에 추대되었다. 강화군교육회 회장에도 추대되었다.[21] 1934년 9월 경기도 김포교육회 회장에 추대되었다.[26] 1936년 평양부의 안전택시(安全택시) 합자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1936년 6월 17일 가평군수에서 퇴관하였다. 동시에 이천자동차주식회사, 강화양조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31]
1945년 10월 23일 미군정청 제주도 도지사 서리 겸 제주도 해사국장에 임명되었고,[43] 11월 12일 전라남도 여수항만청장 겸 전라남도 운수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다.[44] 1946년 1월 12일 교통부 해사국 해운과장에 임명되었다.[45]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교통부 해사국 해운과장으로 유임되었다. 1949년 1월 15일 제5편리호(第五便利號)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파면되었다.[46]
1955년 9월 18일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6년 8월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1일부터 9월 6일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임시 의장을 맡았다.[84] 1956년 9월 30일 민주당 중앙상무위원,[89][90] 1957년 10월 21일 민주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92][93]
1958년 1월 7일 동아일보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당을 탈당하였다.[96][97] 1960년 11월 15일 제2대 서울시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구 제6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108] 다시 민주당에 입당했다. 1962년 4월 15일 군사정권의 정정법 대상자 명단에 민주당 간부로 지목되었다. 1963년 2월 28일 정치정화법 해당자에서 해제되었다.[113]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백아리(白鵝里) 뒷산에 있다.
2. 1. 생애 초반
이원찬은 1893년(고종 29) 5월 14일 또는 5월 10일 경성부에서 구한말 참봉과 사관(士官)을 지낸 이교선(李敎善)과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순칠(朴舜七)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하타니 쇼호비루(羽溪松豊)이다. 그의 생일은 5월 10일인데, 1935년의 조선인사흥신록에는 5월 14일생 설이 전한다.
할아버지는 철종 때의 진사 이재승(李在升)이고, 증조부는 문신이자 시인 분서 이봉녕(李鳳寧)이며, 증조부는 문신이자 시인인 태화 이현상이다. 생조부는 이재정(李在鼎, 초명은 정증(鼎增))이고 생증조부는 택녕(宅寧)이다. 본래는 이상우(李商雨)의 손자 이성석(李聖錫)의 아들 이한우(李漢禹)의 5대손으로, 이한우의 증손 통덕랑 재정의 아들인 아버지 이교선은 이성석의 다른 아들 이한운의 증손 이재승의 양자로 입양왔다. 양할아버지 이재승은 이한우의 형 이한운(李漢雲)의 증손이었다. 아버지 이교선은 9촌 아저씨 이재승의 양자가 되었다.
그의 생조부 이재정(李在鼎)은 행적 기록이 실전됐는데, 2000년대 이후 사마방목을 한글 번역하는 과정에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한 것이 확인되었다.[1] 이재정의 처음 이름이 이정증인 것은 1900년에 발간한 선원보에 수도군 이덕생(守道君 李德生)의 13대손 이완택(李完澤)의 둘째 사위가 李鼎增 羽溪人으로 기록된 것에서 확인되었다.
위로 이복 형으로, 아버지 이교선의 둘째 부인 안동 추씨(安東秋氏) 추희결(秋羲結)의 딸에게서 태어난 이원홍(李源弘), 이원백(李源百), 진주 강씨 강예(姜藝)에게 출가한 누이 등이 있다. 이복 형 이원홍은 대한제국 때 공립보통학교 부훈도를 역임했고, 이복 형 이원백은 통사랑을 역임했다. 이복 형 이원홍의 사망 소식은 매일신보 1927년 02월 01일자 1면 9단에 부음소식에 실렸다. 그밖에 족보에 실리지 않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형이 1명 있었는데, 1935년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조선인사흥신록》에 의하면 이 친형은 1930년에 사망했다.
본적지는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府內面)이다. 이후 한때 평양부에 거주했고, 1920년대 후반에는 경성부 옥인동 1번지에 살았다.[2] 이후 김포군청 관사에 거주하다가 1930년대 후반에는 경성부 종로구 훈정동 9번지로 이주했고 다시 경상남도 부산시 서대신동 2가 260로 이주했으며, 경기도 인천시 전동(錢洞) 28번지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서울로 이주했다.
첫 부인은 탐진 최씨인데 일찍 사망하였다. 그는 경주 최씨 최석문(崔文錫)의 딸 최원정(崔源貞)과 혼인했는데, 최원정의 이름은 1935년 조선인사흥신록 이원찬 편에 나타난다. 조선인사흥신록에 의하면 부인 최원정은 1895년 1월생이었다.[3]
2. 2. 수학과 일본 유학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5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4] 오긍선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얼마 뒤 그는 배재학당을 중퇴하였다.
1907년(광무 10년) 사립 보광일어학교(普光日語學校)에 입학, 1911년 3월 사립 보광일어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상점 점원과 막일 등을 하다가, 1912년 8월 동양생명보험주식회사(東洋生命保險會社) 경성지점에 입사, 동양생명보험사 경성지점 서기보(東洋生命保險會社 京城支店 書記補)로 근무했다.[5] 그 뒤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과 노동 등으로 직접 돈을 모아 1915년 4월 일본 주오 대학(中央大学)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17년 신익희, 최두선, 안재홍 등이 주도하여 만든 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했다. 1917년 9월 30일의 결산총회에 그는 유학생학우회 서무부 부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했다.[6]
1918년 8월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귀국하였다. 그의 졸업은 1918년 9월 19일자 신한민보 도쿄 졸업생 명단에 수록, 보도되었다.[7]
2. 3. 관료 생활과 기업인 활동
1918년 8월 1일 한성은행(漢城銀行)에 입사, 남대문로 한성은행 본점 서기가 되었고, 1920년 5월 한성은행 동경(東京)지점 서기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1922년 5월 사직하고 귀국하였다. 한성은행 직원으로 근무 중 1922년 5월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부속(府屬)에 임명되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보안계 속(屬)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 4월 21일 조선총독부에서 자동차 면허 취업정지 및 자동차 면허 취소 대상자에 올랐다. 당시 그의 주소지는 평양부 목로리 23번지였다. 자동차 면허 취소 사유는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리지 않았다.[8]
1925년 9월 28일 수해이재자 구제회에 수해의연금 70JPY을 기탁하였다.[9] 1926년 4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속(屬)으로 발령받아 검열 업무를 담당했다. 1928년 11월 4일 조선총독부속으로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10]
1926년 2월 18일 이완용 후작 장례식 장의역원을 정할 때, 영결식장 행렬계원(行烈係) 차석으로 진행에 참여했다.[11] 1926년 3월 사무 시찰차 충청남도를 방문, 3월 10일 부여군에 도착하여 부여군을 시찰한 뒤 백제여관에서 1박하고, 3월 11일 서천군 방면을 시찰하였다.[12]
1930년 2월 28일자로 경무과 본부 속에서[13], 조선총독부 속에서 군수 8등으로 임용되었다.[14] 3월 1일 조선총독부에서 각 지방 군수 임지를 발표할 때 강화군으로 정해졌다.[15]
2. 4. 교육 활동과 사회 활동
1931년 5월 강화번영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5월 31일에는 강화양조(江華釀造) 주식회사의 대주주이자 회사 전무이사가 되었으며,[21] 1932년 6월에는 경기도 강화인삼조합 고문에 추대되었다. 강화군교육회 회장에도 추대되었다.[21]
1931년 2월 1일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서 하점면 내에서 생산하는 직물(織物)사업의 관리 목적으로 황우천(黃祐天) 등과 함께 강화산업조합(江華産業組合)을 창립하였다.[22] 1931년 9월 5일 강화군 부내면에 부지를 마련, 견포, 마포, 저포 판매 및 공동 작업장 강화산업조합(江華産業組合)을 조직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여기에는 중역으로 이사 황우천(黃祐天)에게 경영을 일임했다.
1932년 5월 경기도 강화진흥회 조직을 주관,[23] 강화진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고문을 지냈다. 1933년 4월 23일 강화산업조합 이사장이 되었다.[24] 1934년 9월 경기도 김포교육회 회장에 추대되었다.[26]
1936년 평양부의 안전택시(安全택시) 합자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가 안전택시 대표로 취임한 시점은 기록에 없다. 2월 11일 평양부 기림리의 경의유치원에 2000JPY을 기부하였다.[27] 그해 만주 집안현의 수재로 2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2월 19일 조선중앙일보사로 10원의 위문 성금을 기탁했다.[28] 1936년 6월 17일 가평군수에서 퇴관하였다. 동시에 당일부로 이천자동차주식회사, 강화양조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31] 이천자동차는 그의 6촌 매부 이천응(李天應)이 운영하던 회사였다. 동시에 안전택시 대표 취체역을 사직하였다.
2. 5. 광복과 공무원 생활
이원찬은 광복 직후 미군정의 관료로 임명되었다. 1945년 10월 23일 미군정청 제주도 도지사 서리 겸 제주도 해사국장에 임명되었고,[43] 11월 12일에는 전라남도 여수항만청장 겸 전라남도 운수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다.[44] 1946년 1월 12일에는 교통부 해사국 해운과장에 임명되었다.[45]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교통부 해사국 해운과장으로 유임되었다. 그러나 1949년 1월 15일 제5편리호(第五便利號)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파면되었다.[46] 제5편리호는 1949년 1월 15일 새벽 4시 30분경 인천항을 출발, 군산항으로 가던 중 실종된 선박으로, 당시 해사국 해운과장이던 이원찬은 관리 소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2. 6. 민주당 활동과 서울시의원 활동
1955년한국어 9월 18일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는 입당 사유에 대해 "구국(救國)운동 셈 치고 가입하라는 권유로 민주당에 가입하였지요.", "그러나 되도록 정치와 행정과는 구별해서 공익에 이바지하겠다"고 밝혔다.[75] 그 해 서울 종로구 동숭동으로 이주하였고, 서울시의원에 당선된 후에는 종로구 혜화동 165번지로 이사하였다.
12월 14일 민주당 서울 종로을구 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76] 1956년 7월 10일 민주당 서울 종로을구지구당에서 1956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서울시의원 예비후보를 공천할 때 예비후보자 1명으로 공천되었고,[77] 당내 최종 경선에 통과하였다. 1956년 8월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6년 제1대 지방 선거에 서울특별시의회 초대 시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자로 서울 종로구 6선거구에 입후보하여[80][81] 8월 1일 당선되었으며,[80] 총 득표수는 8,219표였다.[81][82] 8월 13일 오후 11시 30분 투표 결과 최종 당선이 확정되었다.[83]
8월 15일 서울시의원으로 취임했다. 1956년 9월 1일부터 시의회 정부의장을 선출하는 9월 6일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임시 의장을 맡았다.[84] 서울시의원 중 최고령자였기 때문에 임시 의장을 맡게 되었다.[84][85][86] 9월 4일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상임위원회에서 의장 한동석(韓東錫)의 작고로 공석인 당 상임위의장에 선출되었다.[87]
1956년 9월 1일부터 1960년까지 제1대 서울시의회 전반기에 서울시의회 운영위원회, 내무위원회 위원(1956년 9월 1일 ~ 1957년 9월 1일), 중반기에는 시의회 운영위원회, 사회보건위원회 위원(1957년 10월 1일 ~ 1958년 9월 1일[88])을 역임하였다.
1956년 9월 30일 민주당 전형위원, 최고위원 5명이 민주당 중앙당 중앙상무위원 50명과 중앙감찰위원 20명을 선출할 때, 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89][90]
1957년 9월 제1대 서울시의회 하반기 의장, 부의장 선출 당내경선에 입후보, 9월 2일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열린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 40명의 투표에서 당시 현의장 김진용(金瑨鎔)은 22표, 그는 18표를 받아 낙선하였다.[91]
1957년 10월 21일 민주당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당내 투표로 각 분야 상무위원, 감찰위원을 선출할 때, 민주당 중앙감찰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92][93] 초대 서울시의회 전반기에 그는 민주당 내 소장파 의원의 대표자로 지목되었고,[94] 시의회 의장 선출 및 각 분과위원장 선거시 신파의 지도자로 지목되었다.[95]
1958년 1월 7일 동아일보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당을 탈당하였다.[96][97] 탈당이유를 "당 내(黨內)의 기개 지도자(幾個指導者)의 독재와 횡포 때문에 언제 어떻게 희생될지 몰라 탈당하는 것이라"고 성명서에 밝혔다.[98] 1월 11일 당시에는 무소속이었다.[99]
1958년 6월 9일 서울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0] 1958년 9월 3일 서울시의회의 의장, 부의장 선출에 1표를 얻어 낙선하였다.[101][102]
제1대 서울시의회 후반기에는 시의회 징계자격위원회 위원, 산업위원회 위원(1958년 10월 1일 ~ 1959년 9월 1일[103]), 시의회 내무위원회, 징계자격위원회 위원(1959년 10월 1일 ~ 1960년 8월 1일) 위원, 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1958년 6월 9일 ~ 1959년 9월 1일) 등을 맡았다.
1958년 9월 27일 서울시의회 내 제2당 시정구락부 소속이었다.[104] 10월 16일 당시에도 시정구락부 소속이었다.[105]
2. 7. 생애 후반
1960년 11월 15일 제2대 서울시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구 제6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108] 12월 12일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우봉운(禹鳳運)은 2,521표, 그는 1,252표를 받아 2위로 낙선하였다.[109] 다시 민주당에 입당했다. 1962년 4월 15일 경향신문에 발표된 군사정권의 정정법 대상자 명단에는 민주당 간부로 지목되었으나, 이때 민주당의 어느 직책에 임명됐는지는 알 수 없다.
1962년 4월 16일 군사정권에서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을 공포, 정정법 제3조 1항 5호에 의거 민주당 간부로 정치정화법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110] 이어 적격심판 대상자 명단에 올라갔다.[111] 이때 그는 마포에 거주하고 있었다.[111] 1962년 4월 15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4374명의 구 정치인을 대상으로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했다.[112]
1963년 2월 28일 정치정화법 해당자에서 해제되었다.[113]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사망 원인과 지병 여부, 사망 장소는 미상이다. 1959년 동아일보에 보도됐던 그의 후처의 행적은 미상이다. 또한 협동운수사의 청산 또는 매각 시점 역시 미상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백아리(白鵝里) 뒷산에 있고, 표석이 있다.
3. 학력
4. 저작
5. 약력
연도 | 내용 |
---|---|
1922년 5월 | 공채 시험 합격, 조선총독부 속(屬) 임명,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보안계 속(屬)으로 근무 |
1926년 4월 |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사서계 속(屬) |
1930년 2월 | 경기도 강화군수(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
1931년 5월 31일 | 강화양조 전무 |
1931년 6월 | 강화교육회 회장, 강화인삼농협조합 고문 |
1932년 5월 | 강화진흥회 고문 |
1933년 4월 | 경기도 김포군수 |
1933년 9월 | 김포교육회 회장 |
1934년 10월 | 경기도 가평군수 |
1936년 2월 | 평양 합자회사 안전택시 대표이사, 합명회사 덕원상회 대표이사 |
1936년 6월 17일 | 경기도 사무관 퇴관 |
1937년 4월 17일 | 경기도 도평의회의원(강화지역구) 예비후보 입후보, 그해 4월 30일 경선 낙선 |
1938년 10월 11일 | 경성부 종로구 대관동 동회 부총대 |
1940년 9월 16일 ~ 1942년 11월 21일 | 대동상업학교 교장 |
1940년 10월 ~ 1942년 3월 | 대동학원 재단 이사 |
1942년 11월 21일 | 대동상업학교 교장직 퇴임 |
1943년 6월 11일 ~ 1945년 8월 25일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장 |
1945년 10월 | 제주항무서 부청장, 여수항만청 부청장 |
1947년 5월 8일 | 제주항무서장, 미군정 교통부 해운국 부국장 |
1949년 | 교통부 인천해사국장 |
1950년 11월 28일 | 교통부 부산해사국장 |
1951년 4월 | 교통부 부산해사국장 재임명 |
1951년 8월 | 면직 |
1955년 12월 14일 ~ 1958년 1월 7일 | 민주당 서울 종로을구지구당 부위원장 |
1956년 8월 ~ 1960년 8월 | 제1대 서울시의원 |
1956년 9월 1일 ~ 1957년 9월 1일 | 서울시의회 운영위원회, 내무위원회 위원 |
1957년 10월 1일 ~ 1958년 9월 1일 | 서울시의회 운영위원회, 사회보건위원회 위원 |
1956년 9월 1일 ~ 1956년 9월 6일 | 서울시의회 임시의장 |
1956년 9월 4일 ~ 1958년 1월 7일 | 민주당 서울종로을구지구당 상임위 의장 |
1956년 9월 30일 ~ 1958년 1월 7일 | 민주당 중앙당 중앙상무위원 |
1958년 1월 7일 | 민주당 탈당 |
1958년 | 시정구락부에 입당 |
1958년 6월 9일 ~ 1959년 9월 1일 | 서울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 |
1958년 10월 1일 ~ 1959년 9월 1일 | 서울시의회 징계자격위원회, 산업위원회 위원 |
1959년 10월 1일 ~ 1960년 8월 1일 | 서울시의회 내무위원회, 징계자격위원회 위원 |
1960년 11월 | 제2대 서울시의원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 |
1962년 4월 16일 | 군사정부에서 발표한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 제3조 1항 5호에 의해 정정법 대상자로 지정 |
1963년 2월 28일 | 정치정화법 해당자에서 해제 |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생조부 | 이재정(李在鼎) | 1807년 | 1840년 | 초명은 정증(鼎增) |
생조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1806년 9월 13일 | 1848년 7월 7일 | 수도군 덕생 13대손 이완택(李完澤)의 딸 |
아버지 | 이교선(李敎善) | 1844년 1월 7일 | 1911년(?) 12월 24일 | |
어머니 (원비) | 원주원씨(原州元氏) | 1843년 1월 24일 | 1879년 8월 6일 | 군수 원수봉(元守綘)의 딸 |
어머니 (계비) | 안동추씨(安東秋氏) | 1854년 4월 11일 | 1928년 12월 30일 | 추희결(秋羲結)의 딸 |
이복 형 | 이원홍(李源弘) | 1889년 1월 7일 | 1927년 2월 1일 | |
이복 형 | 이원백(李源百) | 1893년 3월 12일 | 1959년 9월 11일 | |
이복 형수 | 의령남씨(宜寧南氏) | 1891년 1월 26일 | 1974년 8월 11일 | 남계근(南啓根)의 딸 |
누이 | 이름 미상 | |||
매부 | 강예(姜藝) | 진주인(晉州人) | ||
외조카 | 강낙주(姜洛周) | |||
외조카 | 강익주(姜翊周) | |||
외조카 | 강필주(姜弼周) | |||
어머니 | 밀양박씨(密陽朴氏) | 1868년 | 1926년 1월 12일 | 박순칠(朴舜七)의 딸 |
형 | 이름 미상 | ? | 1930년 | |
부인 | 탐진최씨(耽津崔氏) | 1895년 1월 20일 | ? | 1913년 1월 이전 사망 |
부인 | 최원정(崔源貞) | 1895년 1월 | 1955년 2월 20일 | 경주최씨, 최석문(崔文錫)의 딸 |
아들 | 이성근(李成根) | 1912년 10월 10일 | ? | 1935년 이전 사망 |
아들 | 이용근(李用根) | 1913년 11월 7일 | 1974년 9월 21일 | |
며느리 | 경주김씨(慶州金氏) | 1915년 10월 2일 | 1971년 5월 10일 | |
손자 | 이금홍 | |||
손자 | 이길우 | 삼촌 이영근의 양자로 출계 | ||
손자 | 이길호 | |||
손자 | 이병훈 | |||
손자 | 이병호 | |||
아들 | 이영근(李榮根) | 1920년 8월 17일 | ? | |
며느리 | 오영근(吳映根) | 1824년 1월 23일 | ? | 해주오씨, 오순영(吳舜泳)의 딸, 추탄 오윤겸 후 |
손자 | 이길우 | |||
아들 | 이흥근(李興根) | 1924년 1월 7일 | ? | |
며느리 | 경주최씨(慶州崔氏) | 1926년 8월 13일 | ? | |
아들 | 이양근(李陽根) | 1932년 8월 4일 | 2013년 7월 12일 | |
며느리 | 이종선(李種宣) | 1932년 | 덕수이씨 | |
딸 | 우계이씨 | |||
사위 | 김영민(金永珉) | 청주김씨(淸州金氏) | ||
부인 | 이름 미상 | ? | ? |
7. 평가
江華の産業勵獎、金浦、加平の農業運動に燦たる治績を殘し郡民の敬慕の的となつねたい|강화의 산업 여장, 김포, 가평의 농업운동에 빛나는 치적을 남겨 군민의 경모의 대상이 되었다일본어는 경성일보의 평가가 있다.[115]
8.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명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56년 | 지방 선거 | 시의원 | 서울 종로구 제6선거구 | 민주당 | 8,219표 | 1위 | 당선 | 초선, 민선 1기 | |
1960년 | 지방 선거 | 시의원 | 서울 종로구 제6선거구 | 무소속 | 1,252표 | 2위 | 낙선 | 민선 2기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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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숭정기원후5갑술증광별시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甲戌增廣別試司馬榜目)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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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人事"
매일신보
192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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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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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사
1935
[4]
논문
英米系의 學校, 病院, 敎會事業 批判
193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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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조선인사흥신록
조선신문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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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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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뉴스
동경 한인 졸업생
신한민보
1918-09-19
[8]
간행물
調査及報告
조선총독부 관보
1922-08-10
[9]
뉴스
"水災同情金"
동아일보
1925-09-29
[10]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 관보
1930-02-04
[11]
뉴스
"聖恩鴻大 故李侯爵邸에 御沙汰書御下賜"
매일신보
1926-02-18
[12]
뉴스
"地方人事"
매일신보
1926-03-15
[13]
뉴스
"辭令 廿八日"
매일신보
1930-03-02
[14]
뉴스
"辭令"
조선신문
1930-03-01
[15]
뉴스
"郡守大異動, 一日發表"
조선신문
1930-03-02
[16]
뉴스
"辭令"
동아일보
1930-03-04
[17]
뉴스
"辭令"
동아일보
1930-03-15
[18]
뉴스
"人事"
조선신문
1930-03-09
[19]
뉴스
"人事"
매일신보
1930-03-09
[20]
뉴스
"人事"
매일신보
1930-03-11
[21]
뉴스
"江華普校 尹相亨氏 十年 勤續 表彰"
동아일보
1932-07-30
[22]
뉴스
"江華産業組 創立"
조선일보
1931-02-01
[23]
뉴스
"江華振興會"
조선일보
1932-05-12
[24]
뉴스
"前途囑望되는 江華産業組合"
동아일보
1933-04-28
[25]
뉴스
"辭令"
동아일보
1933-04-12
[26]
뉴스
"인사집회"
조선일보
1934-10-20
[27]
뉴스
"경의유치원에 이천원을 희사, 安全택시 朴源讚씨"
조선중앙일보
1936-02-11
[28]
뉴스
"李源讚씨 特志"
1936-02-22
[29]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5년판)
東亞經濟時報社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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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督府辭令"
매일신보
1936-06-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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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加平郡守退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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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6-17
[32]
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7년판)
東亞經濟時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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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產◇業◇短◇信"
조선일보
193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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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產◇業◇短◇信"
조선일보
1936-05-12
[35]
뉴스
"產◇業◇短◇信"
조선일보
1936-05-12
[36]
뉴스
產◇業◇短◇信
조선일보
193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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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人
경성일보
193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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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人事消息
조선중앙일보
1936-07-04
[39]
간행물
鑛業權移轉
조선총독부 관보
193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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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鑛業著手屆
조선총독부 관보
193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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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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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9년판
東亞經濟時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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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江華郡道議戰, 相當激戰を豫想
조선신문
1937-04-17
[44]
뉴스
五月十日에 改選될 道會員立候補總勢 【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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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뉴스
娘一人に婿八人, 江華郡は大激戰
조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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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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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09-28
[47]
간행물
鑛業
조선총독부 관보
1938-06-24
[48]
뉴스
大關町會 새 町会 새 氣焰巡聽記 社會部를 特設 隣保事業에 注力
조선일보
1938-10-11
[49]
문서
훈정동, 묘동, 봉익동, 돈의동은 1943년 6월 신설된 종로구에 배속, 1946년 10월 1일부로 종로 1,2,3,4가동에 흡수되었다.
[50]
뉴스
閭巷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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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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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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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간행물
朝鮮總督府告示第622號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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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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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194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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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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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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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法人組合登記
조선총독부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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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人事
매일신보
1943-06-12
[60]
뉴스
"人事
제주신보
1947-05-08
[61]
뉴스
人事,인사
제주신보
1948-04-08
[62]
뉴스
金泰錫 公訴 內容
조선일보
194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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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친일파 99인:분야별 주요 인물의 친일이력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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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민국인사록 人事錄
내외홍보사
1950
[65]
뉴스
業者保護에 努力
부산일보
1950-11-29
[66]
뉴스
海事局長 等을 罷免
부산일보
1951-08-12
[67]
뉴스
責任느낀다 李海事局長談
동아일보
195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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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便利號 事件 擴大!
부산일보
195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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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便利號 事件 擴大!
부산일보
195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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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便利號事件 一段落
동아일보
195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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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951년 便利號 침몰사건 관련자 18명 송청
대한민국사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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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海事局長 等 罷免
동아일보
1951-08-12
[73]
뉴스
色鉛筆
부산일보
1951-08-12
[74]
뉴스
騷音·惡臭로 難處
동아일보
1959-06-07
[75]
뉴스
李源讃 씨
동아일보
1956-08-15
[76]
뉴스
委員長 等 決定 民主黨鍾路乙區黨
동아일보
1955-12-14
[77]
뉴스
市議員에 三氏公薦 民主黨 鍾路乙區서
동아일보
1956-07-12
[78]
간행물
全國主要企業體名鑑(1956년판)
대한상공회의소
1956
[79]
간행물
全國企業體總攬(1958년판)
대한상공회의소
1958
[80]
뉴스
民主黨 40席 占有 自由黨은 겨우 一席뿐
부산일보
1956-08-15
[81]
서적
영등포구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1991
[82]
뉴스
서울特別市서 民主黨 壓勝
동아일보
1956-08-15
[83]
뉴스
서울선 自由黨 慘敗
경향신문
1956-08-15
[84]
뉴스
사투리없는멋장이들
경향신문
1956-09-06
[85]
뉴스
議長에 副議長에 金瑨鎔氏, 李幸得氏를 選出
조선일보
1956-09-06
[86]
간행물
대한연감 1958년판
대한연감사
1958
[87]
뉴스
常委議長에 李氏 民主黨 서울市黨
조선일보
1956-09-05
[88]
서적
鄉土 서울 40호
서울특별시史編纂委員會
1982
[89]
뉴스
七十名을 選出
조선일보
1956-10-02
[90]
뉴스
常委 및 監委員 民主黨서 選出
동아일보
1956-10-02
[91]
뉴스
金瑨鎔氏를 再指名 서울市議長 候補로
경향신문
1957-09-03
[92]
뉴스
民主黨常委 構成 院內外九十六名을 選出
동아일보
1957-10-22
[93]
뉴스
正·副議長을 選出
경향신문
1957-10-22
[94]
뉴스
날뛰는 無所屬 議員
조선일보
1957-08-26
[95]
서적
한국 지방제도・자치사연구 2권
손정목
1992
[96]
뉴스
李源讃氏 脫黨 民主黨 서울市議
동아일보
1958-01-09
[97]
뉴스
壇上壇下 截彼南山에 維石 巖巖
동아일보
1958-01-09
[98]
뉴스
이제 좀 反省해 봄이 若何
동아일보
1958-01-10
[99]
뉴스
雩南會舘 豫算 民主黨도 通□
경향신문
1958-01-11
[100]
서적
서울 六百年史 - 5권
서울특별시
1977
[101]
뉴스
서울市議會 議長團을 選出
경향신문
1958-09-04
[102]
뉴스
議長에 朴氏再選
동아일보
1958-09-05
[103]
서적
鄉土 서울 40호
서울특별시史編纂委員會
1982
[104]
뉴스
市議 26日 下午 召集키로 合意
동아일보
1958-09-27
[105]
뉴스
서울市議會 마침내 開會
경향신문
1958-10-16
[106]
뉴스
騷音·惡臭로 難處
동아일보
1959-06-07
[107]
서적
韓國人物錄
韓國及韓國人社
1959
[108]
뉴스
市·道議員立候補者
경향신문
1960-11-15
[109]
뉴스
市道議員選擧 開票結果 13日上午 3時現在
조선일보
1960-12-13
[110]
뉴스
政淨法 追加對象者 名單
동아일보
1962-04-16
[111]
뉴스
適格審判 追加者의 名單
경향신문
1962-04-15
[112]
뉴스
政淨法該當者 307名을 追加 公告
조선일보
1962-04-15
[113]
뉴스
政淨法該當者 中 解除者의 名單
조선일보
1963-02-28
[114]
뉴스
出版消息
조선일보
1931-03-20
[115]
뉴스
李加平郡守退官
경성일보
193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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